애덤 스미스는 1723년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가까운 항구 커콜디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세관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 사망했지만 스미스 모자가 어렵지 않게 살 만한 유산을 남겨 주었다. 스미스는 커콜디의 문법학교를 9살에 입학하여 14살에 졸업한 후, 목사기 되길 바란 모친의 뜻을 따라 같은 해에 글래스고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에서는 허치슨(Francis Hutcheson, 1694~1746)에게 도덕철학을 배웠다.
허치슨은 흄(David hume, 1711~1776)과 더불어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선도한 저명한 철학자였으며, 당시 라틴어로 강의하던 대학 전통을 깨고 영어로 강의한 급진적 교수였다, 그로부터 자연적 자유, 자연법, 정의 , 이성 , 자기사랑의 긍정적 평가 등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핵심 주장을 배웠다. 허치슨은 흄과 더불어 스미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이 두사람과 스미스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대표한다.
스미스는 1740년 글래스고 대학을 최우수로 졸업한 후 목사 양성을 위한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했다. 옥스퍼드 강의는 기대에 못 미쳤고 강의에 실망한 스미스는 , 강의는 거의 듣지 않고 독학으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과 문학을 공부하다가 목사가 될 생각을 접고 장학금 기간이 끝나기도 전인 23세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25세부터 그는 지방 유지들의 후원으로 에든버러에서 사설 공개강좌를 열어 수사학, 문학, 법학, 경제학 등을 강의했다. 유료 강의임에도 명강의로 소문나서 강의는 대성황이었고 그의 명성도 높아졌다. 사설 강좌로 얻은 명성 덕분에 스미스는 28세에 모교인 글래스고 대학에 논리학 교수로 취임했고 그 이듬해 도덕철학 교수로 옮겼다. 아직 학문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당시에 도덕철학은 신학, 윤리학, 법학 및 경제학을 모두 포괄했다. 그는 41세까지 17년간 글래스고 대학교수로 재직했는데 명강의로 소문이 자자했다. 말년에 그는 이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회고했다.
그가 36세 때 그의 첫 저서인 <<도덕 감정론>>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그의 철학과 윤리학, 특히 인간 본성에 대한 그의 깊은 통찰을 보여주는 명저이며, 근래 들어 철학, 심리학, 윤리학, 경제학 등에서 다시 널리 크게 주목받고 있다. 이 책의 출판으로 그는 하루아침에 대학자로서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 덕분에 영국은 물론, 프랑스, 스위스, 멀리 러시아에서도 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들으러 글래스고 대학에 왔다. 스미스는 이 책을 평생 가다듬어 모두 6판을 출판했으며, 마지막 판은 그가 사망하기 직전에 출판되었다.
<<도덕 감정론>>의 명성 덕분에 41세의 스미스는 10대 후반의 소년인 버클로 공작과 그의 동생 가정교사로 초빙됐다. 요즘과 달리 당시의 대귀족 집 가정교사는 보수는 물론이고 사회적 명예에서도 더 높은 대우를 받았다. 글래스고 대학 교수의 연봉 두배인 300파운드를 평생 받는 조건이었다. 스미스는 두 형제를 데리고 2년 반 동안 남부 프랑스와 파리, 그리고 스위스 제네바를 여행했다. 이 여행에서 그는 당대의 세계적 지성 볼테르, 달랑베르 등 프랑스의 백과전서파, 미국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과학자 프랭클린 그리고 프랑스 중농주의의 지도나 케네 등을 만났다. 케네는 당시 프랑스의 중상주의 경제 규제를 반대하고 경제의 자유방임을 주장하여 스미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43세 때 프랑스에서 귀국한 뒤 가정 교사직을 끝낸 스미스는 고향 커콜디에 살면서 프랑스 여행 중에 집필을 시작했던 <<국부론>>을 10년동안 갈고 닦아 53세 때인 1776년에 출판했다. 스미스는 <<국부론>>을 계속 수정하여 최종판인 5판을 죽기 전 바로 전 해인 1789년에 출판했다.
당시 유럽의 지배적 사조인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경제적 자유주의를 명쾌한 논리와 풍부한 역사적 자료를 이용하여 매우 설득력 있게 주장한 이 책은, 평생 문학과 수사학을 단련한 덕분에 표현도 화려하고, 그간 발품을 팔아 현장을 면밀히 조사하고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토론한 덕분에 내용도 현실적이고 풍부했다. <<도덕 감정론>>에 이어 <<국부론>>도 출판 즉시 큰 호응을 얻었으며, 불어와 독일어 등 6개 국어로 번역되면서 스미스는 또 한번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한 경제적 자유주의는 당시 새로운 사회 주도 세력으로 떠오르던 중소상공인들의 생각을 정확히 대변함으로써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당시 영국 수상 피트 (William Pitt) 등 영국 지도자들에게서도 큰 호응을 얻었다. 현실에서 완전한 자유무역이 실제로 실시된 것은 19세기 중반 약 30년 정도의 영국뿐이었지만, 적어도 경제적 자유주의는 19세기 유럽의 시대정신이었다. 지우방임 경제정책이 옳은 방향이라는 것이 19세기 대부분 유럽 지식인들의 믿음이었다. 이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연 것이 <<국부론>>이었다. 비단 19세기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경제적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로 부활하여 세계를 풍미하고 있다.
<<국부론>>이 출판된 1776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14년 동안 에든버러에 살면서 스미스는 ' 스코틀랜드 세관 위원회' 위원으로 일했다. 이 직책은 일이 별로 없고 연봉은 공작집 가정교사 연봉의 2배인 600파운드였다. 그는 런던과 에든버러 두 정부의 자문에도 응하면서 명예롭고 여유있는 노년을 보냈다. 그가 64세에는 글래스고 대학의 '명예이사'에 선출되어 진심으로 기뻐했다. 영국 대학에만 있는 이 직책은 학생들의 직접선거로 선출되며 학생들의 권익보호를 임무로 하는 임기 7월 3년의 비상근직이었다.
67세이던 1790년 7월 스미스는 에든버러에서 병으로 며칠 앓다가 눈을 감았다. 평생 독신으로 아버지도 형제도 없이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지만, 학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저명한 학자로서의 명예롭고 풍족한 일생이었다. 그는 공작이 주는 연금, 세관 위원회 봉급, 책 인세 등으로 상당한 수입이 있었는데 대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남모르게 기부해 왔던 사실이 사후에 알려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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